|
추억 여행
흐린 날씨 탓으로 조금은 우울한 나날이었다. 오후 한때 조금은 푸름을 회복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벗의 음성이 반갑게 들려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가오는 여름휴가의 나들이 길을 자기의 근거지 쪽으로 하는 것이 어떠냐며 초대를 하였다. 계획을 세워 보자며 즐거이 이야길 나누었다. 수화기를 내리며 몇 해 전 여름 휴가지로 예정하였던 제주도를 떠올렸다. 환상과 현실이 만나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는 제주다.
고향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어울리는 설날, 친구들 계모임에서 여름 휴가지로 제주도를 정하였고 모임의 살림을 맡아 수고하는 벗은 이 계획을 추진하고자 비행기 표며 숙식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눈치였다. 일곱 명의 벗들이 함께할 것을 약속하였으니 가족들을 합하면 28명 정도가 되는 큰 규모의 여행단이기에 준비기간을 길게 잡아 2개월 전부터 틈틈이 시간 할애를 하여 준비하는 듯하였다.
삶에서, 여행은 설렘과 새로움 그리고 충만함을 꿈꾸게 한다. 떠나기 전 준비하면서 느끼는 설렘은 오월의 아침처럼 싱그럽기만 하고 여행지에서 대하는 새로움은 환희로 갈무리 지어지고 돌아와 앉으면 무언지 모를 충만함으로 삶의 활력이 됨을 경험한다. 또한, 여행은 일상에서 상실한 힘과 사랑을 우리에게 돌려주기에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듯하다. 정녕 갈 곳이 없다면 빛이 쏟아지는 통로처럼 늘 변화하는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봄도 우릴 변화시킨다. 일찍이 바그너는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며 정처 없는 여행을 통해 변화를 꾀하라고 권하였다.
해마다 여름휴가를 고향인 거제도로만 향하여 왔기에 올해쯤은 다른 곳으로의 여행을 생각하였던 터라 기쁜 마음으로 동행을 약속하였었다. 약속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고, 여행지를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을 하고서 그날을 기다렸다. 8월 15일을 전후로 3박 4일간의 여정, 일주일 정도를 남겼을까? 순조로우리라 예상했던 계획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도저히 일정을 맞출 수 없겠노라고 불참을 알려오는 한 벗을 시작으로 직장관계, 가정문제를 들어 무려 네 명의 친구가 다음 기회를 요구해 왔다. 어찌 벗들을 탓하랴...... . 국제 통화 기금(IMF)체제 때보다도 더욱 어려워졌다는 경제 상황 아닌가? 나 역시도 부담스러운 마음이 있었던 터였다. 남은 두 명의 친구마저도 원래의 여행 취지가 무의미해졌다며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중지를 모으게 되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함이었으리라. 9월경 가족여행을 떠나자며 아이들을 달래야만 했다. 아쉬움으로 묻혀버린 제주도 여행은 이렇게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제주도.
세 번의 이곳 여행으로 말미암아 추억이 머물러 있다. 학창시절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 하였던 터라, 어느 여름방학 젊음을 앞세우고 한 무리의 악당들은 9박 10일간의 여정으로 제주를 침공했다. 남국의 정취를 흠뻑 느끼며 휴양지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 순박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밝지 못하고 활기차지 못함이 근대사의 치욕이며 이데올로기 최대 피해인 4.3 사태의 어두운 한 모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듯하여 아픈 가슴이 되기도 하였던 기억이 있다. 역사의 아픈 기억은 참으로 오래 남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들길을 걷다가 길가 짚더미 속의 노랑지빠귀의 웅크린 모습을 조심스레 살피며 사진기에 담기도 하고 활짝 핀 들꽃 무더기를 보며 탄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온실 속 곱게 자라는 장미와 비교하며 들꽃에도 장미에도 골고루 내리비치는 햇빛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연의 소중함을 생각하였다. 햇빛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의 어머니이며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의 자람을 주지 않는가. 땅속의 감자와 고구마를 익게 하며 풋감을 키워 달콤함을 갖게 하지만 우린 그 은혜를 당연 하게만 여긴다. 자연과 우리는 분리될 수 없으며 어울려 살아가야 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햇빛을 달이 먹은 버린 밤에는 둘러 앉아 낭만과 문학을 나누기도 하면서 젊음을 만끽했었다. 걷다 지쳐 올려다본 하늘은 왜 그다지도 높고 푸르렀던가. 지금도 가끔 당시의 사진들을 보곤 하며 함께 했던 이들을 떠올려 본다. 젊음과 미래를 나누며 기울였던 소주잔의 향기가 아련히 밀려온다.
두 번째의 제주와의 만남은 졸업여행이었다.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정취는 사회진출에의 압박과 두려움을 잠시 잊기에는 충분하였기에 마냥 웃고 즐기며 제주의 향취에 흠뻑 젖었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은 것이 신혼여행 때이다. 사랑스러운 신부와 손잡고 도착한 제주는 초록의 싱그러움을 앞세우고 반겨주었다. 왜 그다지도 설레었던가.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내리고 있던 고향 친구와 벗함으로 인해 신혼 밤의 애틋함은 많이 무디어졌다. 기쁜 날, 술이 없어 되겠느냐는 친구의 꾐에 넘어가 밤 넣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느라 신혼여행의 첫날은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신혼 시절, 그 기억을 들추어내곤 하는 아내에게 오래도록 미안함을 말하곤 하였다. 젊은 시절 추억으로 아롱진 제주이기에 새삼 기대할 것은 적겠지만, 제주에 있는 글벗과의 차 한 잔도 기대했었고 들렀을 때마다 제주가 주는 느낌은 달랐었기에 이번의 여행도 또 다른 감흥이 있으리라 기대하였는데...... .
어김없이 날은 흘러 8월 15일이 기어코 왔다. 조금은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휴가를 맞이하였다. 집안 행사인 벌초와 가족 계모임에 불참하고 제주여행을 떠나러 계획하였던 터라 죄송함을 앞세우고 제주도가 아닌 거제도를 향했다. 거제대교를 넘어서며 제주의 정취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안개에 휩싸여 신비로움까지도 지닌 듯한 내 탯줄이 이어진 거제도를 온몸으로 안으며 긴 들숨으로 가슴을 열었다. 상쾌함이 폐 속까지 밀려드는 듯하였다. 바다를 끼고 도는 절경도 좋지만, 산과 들녘이 아름다운 내 고향 품에 안겨 거제도를 벗 삼아 노닐다가 돌아왔다. 조상을 찾아 벌초도 하였고 순수함을 간직한 채 고향 지킴이로 살아가는 벗들과 회포도 풀었으며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며 그렇게.
몇 해 전의 아쉬움을 떠올리며 또다시 여름휴가를 맞이했다. 이루지 못한 제주 여행은 또 다른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한 장의 빛바랜 그림엽서를 꺼내 보듯 여름날이 되면 삶의 한 부분처럼 꺼내볼 것만 같다. 삶에서 여유가 없고 훌쩍 떠남을 계획 못할 때 추억 속 상상여행은 자못 행복을 주는 것 같다. 사람은 세월을 닮아간다고 하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간직한 많은 추억을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들의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추억만은 새록새록 보물처럼 반짝인다.
홀로 앉아 사유하는 이 밤, 얼마 전 다녀온 고향 거제의 모든 기운이 밀려오며 평안한 잠을 원한다. 내 어린 날 소중한 추억의 보물 창고는 꿈속에서 활짝 열어보리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