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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손님 4
혼자 밤길을 걷는 게이코의 걸음은 괘 분주했지만 그 표정만은 어느때보다 한결 밝았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게이코 또래의 너댓명 남녀 중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게이코의 어깨를 툭 친다.
"게이코 아냐?"
고개를 돌려보니 아는 친구이다.
"무척 즐거운 표정인걸. 혹시 데이트하고 오는 길 아냐?"
게이코는 당황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일하고 오는 길이야."
"변명할 것 없어. 실은 우리도 데이트중이거든."
하며 친구는 일행에게로 눈길을 준다.
"우리 저녁 먹고 디스코 클럽에 갈 거야. 괜찮다면 같이가자."
게이코가 사양하자 친구는 요란스럽게 손을 흔들며 가버렸다.
게이코는 맛있는 저녁을 사먹고 디스코 클럽에 가는 친구가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조금전의 마지막 손님 생각으로 가득차 있고 그래서 얼굴엔 밝은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맨먼저 어머니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교통 사고를 당해 벌써 몇 달째 누워있다.
"어머니, 돌아왔어요.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
"오늘은 추웠지? 그런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그렇게 보여요?"
"넌 무슨 일이 있으면 곧 얼굴에 나타나잖니."
"별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나도 모를 일이에요. 얼른 저녁상 차릴게요."
어머니는 안쓰러운 눈길로 딸의 뒤모습을 바라본다.
게이코가 부엌으로 들어섰을때 여동생이 앞치마를 두르고 생선을 굽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늦어서......"
"아냐, 언니. 할 줄 몰라서 생선만 구워놨어."
게이코는 서둘러 앞치마를 두르고 냄비에 물을 붓고 저녁 준비를 했다.
"수고했다. 이잰 언니가 할 테니 밥상을 차려 줘."
그때 초등하교 6학년인 남동생이 들어와서는 생선구이를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보더니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휴! 또 고등어 구이야? 가끔씩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 먹었음 좋겠다."
작은 누이가 손을 들어 나무라듯 쥐어흔든다.
" 사내 대장부가 반찬 타령하면 못써. 우리 집은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가지 않으면 안돼. 알만한 애가 왜 그러니?"
"그럼 고등어만이라도 바꿀 수 없어? 반찬 타령 안하게......"
남동생은 여전히 볼멘 소리로 중얼거린다.
"네네, 도련님, 반찬 타령 안하게 해드리죠......"
게이코의 말에 남매는 가르르 웃어 버렸다.
게이코에게는 남동생이 둘, 여동생이 셋이 있다. 장녀인 게이코가 식탁을 에워싸고 동생들과 함께 저녁 한때의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이때뿐인 것이다.
맛있게 식사를 하던 막내가 갑자기 물었다.
"이것 맛 좋은데요...... 아버진 지금쯤 어디서 무엇하고 계실까?"
"아버지 얘긴 꺼내지 않기로 했잖아!"
바로 위의 누이가 말을 자른다.
저희들끼리의 토닥거림을 보고 게이코는 마음이 아팠다. 막내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다. 어리다면 어리고 아직 응석을 부릴 나이이기도 하다.
그런데 집을 나가 버린 아버지에게서는 벌써 몇 년째 소식이 없다. 동생들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이따금씩 아버지가 보고 싶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이 부러울 테지......
식사를 마친 후 게이코는 어머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소반에 담아 혼자 식사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병석에 누워 있는 사람답지 않게 매우 밝았다.
게이코는 무엇보다도 그 점이 다행스러웠다. 어머니는 자신이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어린 딸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늘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밝은 표정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게이코는 잘 알고 있다.
스탠드를 밝히고 책상 앞에 앉은 게이코는 일기자에 한 편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손님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한 사람으 손님의 생활을 위해
나의 이익을 저버린다.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우리 상인들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다.
시계가 열 시를 알린다. 게이코는 시계를 본 다음 뒤돌아본다. 불 꺼진 방안에는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로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모습이 보인다.
맨끝 방문 쪽 비어 있는 곳이 게이코의 자리이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으나 쉽게 잡이 오지 않앗다. 벌써 10시...... 그 손님 지금쯤 나고야에 도착했을까? 불현듯 그 손님이 떠오르고 꼬리를 물고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이어진다.
과자를 보고 기뻐하는 노부인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며 이 과자가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그 말에 난감해한는 그 사람.
또 다른 영상은, 과자가 목에 걸려 고생하는 그 부인과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사람.
목에 걸린 과자를 토해내게 하려고 진땀을 빼는 모습 등등이 게이코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이것저것 온갖 생각이 자꾸 떠올라 게이코는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다음날, 어제 저녁의 일이 걱정되어 게이코는 어느 때보다도 일찍 가게로 나갔다.
"안녕, 나미코."
나미코가 가게 앞을 쓸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게이코를 맞는다.
"안녕, 게이코. 엊저녁에 늦게 퇴근했잖아?"
"그래."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빨리 나왔지?"
게이코는 급히 전화기 쪽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조금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어딘가로 다이얼을 돌리는 게이코의 표정이 조금은 초조한 빛을 띠고 있다.
"여보세요, 시로도 씨인가요?"
"아, 게이코 양이군요. 내가 어제 가게에 갔던 시로도입니다."
"어제는 멀리까지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어머님은 어떠셨는지요?"
"네, 나야말로 고마웠습니다. 어젯밤에 곧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역시 차가 밀려 집에 도착했더니 10시 반이더군요. 그런데 어머니는 기다리다 지치셨던지 10시에 숨을 거두신 뒤였어요.
모처럼 게이코 양이 어머니를 위해 골라 주신 과자를 맛보여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언쩐지 나도 돌아오는 길에 공연히 신경이 쓰여서 늦어질 것 같다고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지요. 그리고 게이코양 이야기도 했습니다."
게이코의 얼굴은 긴장해 있었으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울음을 삼키느라 잠시 말을 멈추고 있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게이코 양! 게이코 양!' 하며 가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미안합니다."
시로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답니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숨을 거두시기 전에 갑자기 당신의 가게를 '그 가게, 좋은...... 가게로군' 하고 말씀하시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요, 정말로. 당신의 착한 마음, 평생 잊지 못......"
시로도 역시 목소리가 젖어드는가 싶더니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게이코는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무언가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처럼 말을 할 수가 없다. 가까스로 게이코는 입을 열었다.
"장례식은 언제인가요?"
"네, 내일 오후 1시 저희 집에서 거행할 겁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게이코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 하늘을 바라보아도 부옇게 어른거릴 뿐이었다.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나고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하고, 소박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사람을 생각하니 가엾고 불쌍해서였다.
그때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오던 지배인 가야마가 게이코의 모습을 보고,
"게이코, 안녕? 그런데 왜 그러지? 무슨 일이 있었어?"
하고 걱정스레 묻는다.
게이코는 한껏 마음의 동요를 억누르고 애써 눈물을 감추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게이코의 태도에 더는 묻지 않았지만 가야마는 왠지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날 오전 게이코는 좀처럼 하지 않던 아주작은 실수를 했다. 반드시 게이코의 실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손님이 물건을 두고 갔는데 그것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 것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손님이 자리를 뜨면 혹시 잊은 물건이라도 없는가 싶어 꼭 확인하던 그녀였는데 그날따라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사치코가 그 물건을 들고 뒤쫓아 갔지만 시간이 조금지난 후라 만나게 될지도 걱정되었다.
그러다 "다녀왔습니다." 라고 사치고의 목소리를 듣고 게이코는 고개를 들었다. 사치고의 손에 물건이 없음을 보고 게이코는 적이 마음을 놓았다.
"죽어라고 뛰어갔어요. 다행히 지하철 홈을 나가기 전이더군요. 아주 기뻐했어요. 돌아오는 길에 역전에서 나카가와 씨를 만났는데 그가 바래다 주었어요."
"그랬군...... 앞으로는 우리가 좀더 손님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때 나카가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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